2024년 6월 3주차 주간보고 드립니다 (vol. 37)

알람도 없이 맘껏 자고 일어난 휴일 아침. 부스스한 얼굴로 거실에 나와 마실 물을 끓입니다. 아직 의식과 무의식의 중간쯤을 서성거리느라 몸과 맘이 영 굼떠요. 괜히 여기저기 부딪히고 헛손질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삐이-' 하고 전기포트가 울리면 뜨거운 물을 컵에 따르고 찬물을 조금 섞는 일만은 아주 매끄럽게 진행됩니다. 정신을 차려 보면 물컵을 마주하고 창문 앞 테이블에 앉아 있곤 하니까요.
테이블에 앉아 호로록호로록 따순 물을 불어 마시면 덩달아 늦잠을 잔 소망이가 밥 먹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토도독토도독. 밥그릇에 남은 사료 중에서 좋아하는 종류만 (코로 열심히 밀어내) 골라낼 때 나는 소리예요. 창 밖을 내다보며 그 소릴 듣고 있으면 하품이 계속 납니다. 하아암하아암. 하나뿐인 제 입이 물 마시랴 하품하랴 바빠요. 계속되는 하품 소리 위로 새로운 소리가 또 하나 겹쳐집니다. 보도독보도독, 귀엽고 야무진 소리요. 잠이 덜 깬 소망이가 눈을 지그시 감고 단단한 사료를 느릿느릿 씹어 먹는 소리예요.
이 소리들은 저를 완전한 의식의 세계로 불러들이는 유도음이자 소망이와 제가 만드는 기막힌 앙상블입니다. 이것으로 충만하고 다른 게 더 필요하지 않다고 읊조리게 하는 아침의 주문이기도 합니다. 남은 물을 불어 마시고 아직 밥그릇에 고갤 파묻은 소망이의 엉덩일 끌어안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지를 지나 여름의 한가운데로 갑니다.

아직 모르는 세계
바야흐로 콩국수의 계절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콩국수에 조예가 깊은 사람 같죠? 그런데 사실 콩국수는 처음이에요. 아, 어딘가에서 상차림으로 나온 콩국수를 먹어 본 적은 있죠. 동행이 주문한 콩국수를 한두 젓가락 맛본 적도 있었고요. 그런데 식당에서 제 메뉴로 콩국수를 주문해 먹거나 집에서 만들어볼 생각은 해본 적은...... 없었더라고요.
요전날 자주 가는 동네 국숫집에 갔습니다. 국수와 수제비가 맛있고 겉절이와 열무김치가 끝내 주는 집인데요. 여느 날처럼 칼국수나 열무 막국수를 주문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콩국수 하나 주세요.”가 튀어나온 거 있죠?
'콩국수 개시'라는 문구와 함께 가게에 걸려 있는 콩국수 사진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옆 테이블에 놓인 걸쭉한 콩국수의 자태 때문이었을까요? 모르겠어요. 하여튼 뭐에 홀린 것처럼 콩국수를 주문했어요. 그리고 첫 입부터 완전히 반해버렸습니다!!! 부드럽고 꼬수운 콩국물과 쫀득하고 담백한 중면의 조화는...지금껏 몰랐던 맛이었어요. 6월 14일의 일입니다.
그 후로 일주일에 한두 번씩 콩국수를 먹으러 갑니다. 그걸론 모자라 인터넷으로 콩국물을 주문해 콩국수를 만들어먹기도 했고요. 국숫집에서 먹은 걸쭉한 서리태 콩국물을 떠올리며 콩국수 레시피를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조만간 퇴사원 주간보고 ‘열해음소’ 코너에 콩국수 레시피를 담아 보낼지도 모르겠네요. 뒤늦게 눈을 뜬 콩국수의 세계는 참으로 꼬숩습니다. 모르고 산 날들이 억울할 지경이에요(콩국수 없이 보냈던 무더운 여름들이여). 한편, 이제라도 콩국수 월드에 진입한 게 얼마나 다행인가도 생각합니다. 앞으로 써 내려갈 인생 콩국수의 역사(...비장 그 자체)가 기대되기도 하고요.
우연히 시도한 새로운 음식, 콩국수 한 그릇의 파장이 꽤 큽니다. 이렇게 주간보고의 한 꼭지를 장식했을 뿐만 아니라 아직 모르는 맛, 존재, 이야기, 세계가 잔뜩 남아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됐으니까요. 제 삶에 들어오려고 기다리는 세상의 조각들이 아직 이렇게 많다는 것, 신나고 재밌는 일이에요.

퇴사원의 근황보고
'퇴사원이라 회장님도 못 말리는 tmi 파트, 주간보고 요약' 코너가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요? 매주 발행에서 월 2회 발행으로 바뀌다 보니 [지난주에 한 일]과 [이번 주에 할 일]로 정리하여 전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앞으론 '퇴사원 근황보고' 코너로 간소하게 정리해 보내볼게요.
- 『아무튼, 집』 중쇄 소식을 전합니다,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 이제 밀리의 서재에서도 『아무튼, 집』을 만나실 수 있어요.
- 밑미에서 운영하는 모닝페이지 리추얼, 7월과 8월은 쉬어갑니다.
- 세계고전문학 읽고 되짚기 좋아하시는 분? 제가 무척 좋아해서 세계고전문학을 함께 읽는 커뮤니티 혹은 콘텐츠를 만들어보려고 기획하고 있어요. (아직 구체화한 것은 아니지만... 뱉어놓고 수습하기 권법) 수많은 일 중에 그저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하는 일도 있었으면 해서요. 고전문학을 사랑하는 동지님들이 계시다면 게시판이나 메일로 '저요, 저요🙋🏻♀️' 외쳐주시거나 함께 즐기고픈 콘텐츠에 대한 의견 전해주세요. 기다릴게요.

편히 의견과 감상을 전하실 수 있도록 게시판을 만들었습니다. 이전처럼 메일 답장을 보내주셔도 좋습니다. 보내주신 이야기들은 기쁜 마음으로 감사히 읽겠습니다.
2024년 6월
콩국수에 빠진
퇴사원 김미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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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3주차 주간보고 드립니다 (vol. 37)
알람도 없이 맘껏 자고 일어난 휴일 아침. 부스스한 얼굴로 거실에 나와 마실 물을 끓입니다. 아직 의식과 무의식의 중간쯤을 서성거리느라 몸과 맘이 영 굼떠요. 괜히 여기저기 부딪히고 헛손질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삐이-' 하고 전기포트가 울리면 뜨거운 물을 컵에 따르고 찬물을 조금 섞는 일만은 아주 매끄럽게 진행됩니다. 정신을 차려 보면 물컵을 마주하고 창문 앞 테이블에 앉아 있곤 하니까요.
테이블에 앉아 호로록호로록 따순 물을 불어 마시면 덩달아 늦잠을 잔 소망이가 밥 먹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토도독토도독. 밥그릇에 남은 사료 중에서 좋아하는 종류만 (코로 열심히 밀어내) 골라낼 때 나는 소리예요. 창 밖을 내다보며 그 소릴 듣고 있으면 하품이 계속 납니다. 하아암하아암. 하나뿐인 제 입이 물 마시랴 하품하랴 바빠요. 계속되는 하품 소리 위로 새로운 소리가 또 하나 겹쳐집니다. 보도독보도독, 귀엽고 야무진 소리요. 잠이 덜 깬 소망이가 눈을 지그시 감고 단단한 사료를 느릿느릿 씹어 먹는 소리예요.
이 소리들은 저를 완전한 의식의 세계로 불러들이는 유도음이자 소망이와 제가 만드는 기막힌 앙상블입니다. 이것으로 충만하고 다른 게 더 필요하지 않다고 읊조리게 하는 아침의 주문이기도 합니다. 남은 물을 불어 마시고 아직 밥그릇에 고갤 파묻은 소망이의 엉덩일 끌어안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지를 지나 여름의 한가운데로 갑니다.
아직 모르는 세계
바야흐로 콩국수의 계절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콩국수에 조예가 깊은 사람 같죠? 그런데 사실 콩국수는 처음이에요. 아, 어딘가에서 상차림으로 나온 콩국수를 먹어 본 적은 있죠. 동행이 주문한 콩국수를 한두 젓가락 맛본 적도 있었고요. 그런데 식당에서 제 메뉴로 콩국수를 주문해 먹거나 집에서 만들어볼 생각은 해본 적은...... 없었더라고요.
요전날 자주 가는 동네 국숫집에 갔습니다. 국수와 수제비가 맛있고 겉절이와 열무김치가 끝내 주는 집인데요. 여느 날처럼 칼국수나 열무 막국수를 주문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콩국수 하나 주세요.”가 튀어나온 거 있죠?
'콩국수 개시'라는 문구와 함께 가게에 걸려 있는 콩국수 사진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옆 테이블에 놓인 걸쭉한 콩국수의 자태 때문이었을까요? 모르겠어요. 하여튼 뭐에 홀린 것처럼 콩국수를 주문했어요. 그리고 첫 입부터 완전히 반해버렸습니다!!! 부드럽고 꼬수운 콩국물과 쫀득하고 담백한 중면의 조화는...지금껏 몰랐던 맛이었어요. 6월 14일의 일입니다.
그 후로 일주일에 한두 번씩 콩국수를 먹으러 갑니다. 그걸론 모자라 인터넷으로 콩국물을 주문해 콩국수를 만들어먹기도 했고요. 국숫집에서 먹은 걸쭉한 서리태 콩국물을 떠올리며 콩국수 레시피를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조만간 퇴사원 주간보고 ‘열해음소’ 코너에 콩국수 레시피를 담아 보낼지도 모르겠네요. 뒤늦게 눈을 뜬 콩국수의 세계는 참으로 꼬숩습니다. 모르고 산 날들이 억울할 지경이에요(콩국수 없이 보냈던 무더운 여름들이여). 한편, 이제라도 콩국수 월드에 진입한 게 얼마나 다행인가도 생각합니다. 앞으로 써 내려갈 인생 콩국수의 역사(...비장 그 자체)가 기대되기도 하고요.
우연히 시도한 새로운 음식, 콩국수 한 그릇의 파장이 꽤 큽니다. 이렇게 주간보고의 한 꼭지를 장식했을 뿐만 아니라 아직 모르는 맛, 존재, 이야기, 세계가 잔뜩 남아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됐으니까요. 제 삶에 들어오려고 기다리는 세상의 조각들이 아직 이렇게 많다는 것, 신나고 재밌는 일이에요.
퇴사원의 근황보고
'퇴사원이라 회장님도 못 말리는 tmi 파트, 주간보고 요약' 코너가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요? 매주 발행에서 월 2회 발행으로 바뀌다 보니 [지난주에 한 일]과 [이번 주에 할 일]로 정리하여 전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앞으론 '퇴사원 근황보고' 코너로 간소하게 정리해 보내볼게요.
편히 의견과 감상을 전하실 수 있도록 게시판을 만들었습니다. 이전처럼 메일 답장을 보내주셔도 좋습니다. 보내주신 이야기들은 기쁜 마음으로 감사히 읽겠습니다.
2024년 6월
콩국수에 빠진
퇴사원 김미리 드림